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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시프 스탈린/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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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상화의 절정 == [youtube(852NljZnYVY)] [youtube(Nt1PbvECQps)] 상황이 이렇다 보니 주변에 아첨하는 무리가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전대미문의 독재자답게 단순히 아첨에만 그치지 않았다. 스탈린에게 바쳐진 것은 그냥 아첨이 아니라 거의 '''숭배''' 수준이었다.[* 이는 당 대회에서도 드러나는데 1930년에 열린 제16차 당 대회에서는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와 '열렬한 환호'를 받더니, 대숙청 이후에 열린 제 18차 당 대회에서는 아예 당 대회 조직위가 '우리의 지도자이며 교사이고 친구이신 스탈린 동지 만세'라는 노래를 준비했다. 전쟁 발발 2년 전인 1939년이 이 정도인데 승전 후인 1950년대는 오죽하겠는가(...) ] 사실 스탈린 자신은 지나친 숭배 의식과 열풍에 당혹스럽다며 선전에 도가 지나치다고 불평했다. '''그렇다고 선전과 숭배 의식을 제한하지는 않았다.''' 당시 이러한 숭배 의식을 만들어낸 건 결국 스탈린 본인의 절대자적인 통치 스타일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가 숭배 의식을 비판한 것은 당연히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었다. 히틀러와의 전쟁에서 이긴 영광을 독차지한 스탈린은 후일 [[니키타 흐루쇼프|흐루쇼프]]가 개인 숭배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던 우상화를 가속화해나갔다. 아무튼 전후 소련에서는 웃지 못할 스탈린 숭배 열풍이 불었다. 한 번은 1945년에 스탈린 전집이 출간될 때의 일이다. 스탈린은 종이가 부족하니 3만 부만 찍자고 했다. 그러나 주변인들은 '''대중의 요구가 엄청날 것'''이라면서 적어도 30만 부는 찍어야 한다고 말했다. 겸손한 스탈린 동지는 마지못해(?) 이에 동의했다.[* 이런 식의 이른바 충성 경쟁은 스탈린 정권에서 흔한 일이었다. 스탈린 스스로가 사치나 허영과는 거리가 먼 것도 한 몫했겠지만, 이렇게 자신을 의도적으로 낮추어서, 상대방에게 충성심을 드러내 보일 것을 강요하는 것은 정권 당시에는 일종의 의례였다. 의도 자체는 러시아나, 2015년 [[시진핑]] 주도의 열병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스탈린은 이를 일상화했다. 스탈린이 가진 인간에 대한 편집증적 불신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그는 자신의 전기를 읽고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스탈린은 자신에 대한 도가 지나친 아첨이 가득한 스탈린 전기를 읽고 '''"우리에게 우상 숭배자는 필요 없소... 우리에겐 마르크스와 레닌의 가르침이 있으니 다른 것은 필요 없소."''' 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스탈린 전기가 발간이 취소되지는 않았다.''' 스탈린을 신성한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의 후계자로 보는 ''''단기 과정'은 전후 천만부가 발간되었다.''' 동시에 전기는 100만부 이상, 전집은 50만부 이상 발간되었다. 스탈린의 숭배는 이제 소련 출판계의 사명이었고, 소비에트 언론이 가야 할 길이었다. 전쟁 전과 마찬가지로 스탈린에 대한 수많은 포스터가 제작되었다.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스탈린에 대한 철저한 세뇌는 미덕이 되었다. 스탈린 우상화는 1920년대부터 레닌과 엮어서 레닌의 계승자로 슬슬 나왔고 1930년대부턴 레닌을 제치고 자체 우상화로 더 심해지더니 대숙청이 시작되자 열광적으로 변하고 독소전쟁에서 승리하자 신격화되기 이른다. 1940년대 소련 지도를 보면 독소전쟁때 유명한 격전지 스탈린그라드 뿐만 아니라 [[노보쿠즈네츠크|'스탈린스크']], '스탈리노고르스키', '스탈린스키', [[카토비체|'스탈리노그라트']], [[두샨베|'스탈리나바드']], [[도네츠크|'스탈리노']] 같은 도시가 등장한다. 심지어는 모스크바를 '스탈리노다르 혹은 스탈린다르(스탈린의 선물)로 바꾸자는 아부성 청원이 나왔고[* 이 건을 먼저 제안한 인물은 다름아닌 [[니콜라이 예조프]]로 자신의 숙청이 초읽기에 들어갔다는 것을 감지하고 살아보려고 발악한 것이다. 하지만 스탈린은 오히려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였고 예조프는 1940년에 처형된다.] 역법을 '''예수 태어난 연도 따위하면서''' 서기 연도를 대체하여 [[주체연호|스탈린 생일을 기준으로 하자는 의견]]도 나온다. 이 두가지는 겸손한 스탈린 동지도 낯간지럽다고 생각했는지 사양한다.[* 사람 생각은 다 거기서 거기인지, 대한민국에서도 [[이승만]]의 호인 '우남'을 따서 서울특별시를 우남특별시로 개명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하지만 이승만은 스탈린과 마찬가지로 낯간지럽다고 생각했는지 이 안은 실현되지 않았다. 북한의 경우는 한 술 더 떠서 [[김일성]] 사후 김일성의 생일연도(1912년)를 따라 [[주체연호]]로 쓴다. 왕조국가라는 비아냥이 나오는 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우상화는 여기가 한 수 위. [[카자흐스탄]]의 독재자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시절에도 수도 [[아스타나]]의 이름을 누르술탄으로 바꾸자는 안이 올라왔는데, 나자르바예프 역시 이를 거절했다. 그런데 나자르바예프 사임 이후 권한대행 [[토카예프]]에 의해 진짜로 시행되었다. 덕분에 아스타나는 [[2022년 카자흐스탄 시위]]로 다시 아스타나가 되기 전까지 약 3년간 누르술탄으로 있어야 했다.][* 비슷하게 히틀러도 만슈타인에게 불쾌감을 보인 적 있다. 만슈타인이 히틀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아는데 히틀러 만세를 외치자 너무 속보이는 아부라고 느꼈는지 오히려 핀잔을 준 적 있다. 히틀러는 자기 앞에서 자신감 있게 자기의견을 내는 부류의 인물들을 좋아했다.] 영화 <베를린 함락>에서는 감독이 스탈린 홀로 히틀러의 패배를 궁리하며 참모부 지도를 주시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전쟁 시 신화 속엔 스탈린이 홀로 전쟁영웅-정치인의 실체가 되었다고 믿을 판이었다. 1948년 소련 예술상 출품작 중에 단 두 편만이 위대한 스탈린을 묘사하지 않은 작품이었다. 새로운 노래나 출판물은 말할 것도 없었다. 노래도 손발이 오그라드는 스탈린 찬양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히틀러의 저서인 나의 투쟁은 겨우(?) 1000만부 판매에 그쳤으나[* 대부분은 국비로 결혼하는 부부에 증정한 것이지만.] 스탈린의 저작들은 총 7억 600만부가 팔렸다. 레닌의 저작은 2억 7,900만부, 마르크스-엥겔스의 저작은 꼴랑 650만부가 판매 되었다. 하지만 인류 역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던 스탈린 동지의 기록은 [[마오쩌둥]]에게 곧 깨진다. 마오주석 어록은 44억부가 출판되었다. 역시나 대륙의 기상이다.[* 스탈린과 마오의 저서들은 독재자가 쓴 불쏘시개쯤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 그들의 저서들은 [[나의 투쟁|히틀러의 대표작]]과 달리 '스탈린과 마오쩌둥이라는 중요 역사인물에 대한 1차 사료'라는 점을 '''배제'''하고 저작 자체로만 평가해도 나름 학술적인 가치를 인정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마디로 자국민들에게 오직 [[스탈린주의|자신]][[마오이즘|들의]] [[나치즘|사상]]만이 옳은 것이고 나머지는 다 틀린 것이라고 자신의 이념을 절대화하여 [[코렁탕|강요]]한 독재자라는 점은 셋이 마찬가지지만 그 주장의 내용과 사상적 완성도에서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마오주의]]는 해당 항목에서도 설명되듯 나름의 논리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현실 정치에서 보더라도 2차대전 이후 신생 독립국들에서 퍼져나간 공산주의 혁명운동에는 소련식 [[마르크스-레닌주의]]보다 훨씬 강력한 영향력을 끼쳤다. 그리고 [[스탈린주의]] 역시 나름 고유의 체계를 갖춘 이론이었으며 이는 스탈린 자신이 마오쩌둥의 저서를 보고는 "어머 시발 이게 무슨 마르크스주의야? 이건 봉건주의자너" 라고 따질 정도의 이론적 기반은 갖춘 인물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반면 《나의 투쟁》은 문장은 비문, 내용은 모순투성이로 훗날의 히틀러조차 자신이 그런 책을 썼음을 쪽팔려했고, 히틀러의 동맹이던 [[파시즘]]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조차 "이건 뭐 뭔 소린지 알아먹지도 못하겠고, 재미도 없는데 뻔한 소리만 늘어놓고 있다"고 깔 정도였다. 당장 [[나의 투쟁|해당 항목]]에 요약된 내용만 봐도 사회 구조적 분석은 엿바꿔먹을 만큼도 없고 그냥 "나는 유대인이 싫고 마르크스주의가 싫고 하여간 뭐든지 다 싫다"는 징징거림이나 "우리 아리아인은 짱잘났어"라는 자뻑 외에는 별 내용이 없는 책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나의 투쟁이 학술적 자료로서의 가치를 어느 정도 인정받는다는 것은 히틀러라는 역사적 인물의 사고방식과 사상을 알 수 있는 자료라는 뜻이지 그 책의 내용 자체에 연구가치가 있다고 여겨진다는 뜻은 아니다.] 레닌이 사망한 이후 공산당은 레닌의 유품과 사진을 전시했는데, 스탈린은 권력이 커질수록 자신의 초상화를 [[블라디미르 레닌]]의 초상화와 동등한 위치에 걸도록 했으며, 그 크기도 시간이 지날수록 기하급수적으로 커져갔다. 소련 곳곳에 걸린 포스터와 그림에서 스탈린은 항상 머리를 꼿꼿이 치켜세운 위엄있는 모습이거나, 동료들보다 어깨를 추켜세운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빌딩벽과 모든 가정, 사무실에는 스탈린의 사진이 걸렸다. 스탈린은 그 누구하고도 영광을 함께 나누기를 원하지 않았다. 전쟁 기간 중 총사령관의 제복을 입었던 그는 군인으로서 자신의 명예를 기리기 위해 죽을 때까지 그 제복을 입었다. 게오르기 주코프와 같이 승리에 큰 공을 세운 장군들도 전쟁이 끝난 뒤에는 공개 석상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 스탈린이 사실상 권력의 전면에 서기 시작한 1929년 50살 생일에서 받았던 찬사는 갈수록 터무니없이 변해갔다. '''"그는 우리들의 경애하는 아버지이자 우리의 절친한 안내자요 교사이며 모든 시대, 모든 인간들을 통틀어 가장 위대한 지도자"'''였다. 시인들과 작곡가들은 작품을 통해 스탈린을 찬양하였고, [[러시아 정교회]]의 대주교는 그를 신의 선택된 아들이라고 칭송하였다. [[빅 브라더|스탈린은 어디에나 있었다.]] 공개적인 장소에는 그의 초상화가 걸리지 않은 곳이 없었고, 극장에서도 스크린의 양쪽 끝에는 스탈린과 레닌의 실루엣이 비춰졌다. 스탈린의 조각상은 산꼭대기와 깊은 숲속에까지 세워졌다. 1951년 볼가-돈 운하에 36피트 높이의 청동 33톤이 소비된 거대한 스탈린의 동상이 세워졌다. 탈스탈린화가 진행되던 1961년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에 있던 스탈린의 초상화들이 제거되었는데 그 양이 너무 엄청나서 정부는 군대까지 동원해야 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스탈린은 [[러시아 혁명]]과 그 외 중요한 사건에서 자신의 역할을 확대 해석하는 방향으로 모든 역사책과 백과사전을 새로 집필하도록 명령했다. 다른 사람들의 업적은 하향 평가되었으며, 인민의 적으로 지목된 자들의 기록은 모두 삭제되었다. 이들은 존재했던 사실 자체가 말살되기도 하였다. 러시아 혁명은 레닌과 스탈린 두 사람만의 역사로 수정되었고, 트로츠키를 비롯한 반동분자들의 모습은 모든 사진에서 삭제되었다. 또한 스탈린은 자신의 공식적인 전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직접 덧붙였다. >그는 당과 인민의 지도자로서 주어진 과업을 더할 나위없이 훌륭하게 수행하였다. 또한 전 소비에트 인민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있었지만, 스탈린은 결코 조금의 자만심이나 자부심 혹은 자기 과시의 빛을 보이지 않았다. 이런 지도자 신격화를 [[북한|어디]]의 선전물에서 많이 본 것 같다면 '''절대 기분 탓이 아니다.''' 북한의 모든 선전, 선동 기법은 스탈린 식 선전선동 기법의 철저한 모방화 - 이후 민족주의 주입에 있었다. 당연히 스탈린을 찬양하는 포스터에서 북한 냄새가 나더라도 그게 당연한 것이다. 오히려 북한 선전물에서 스탈린 시절의 소련 냄새가 난다고 하는 게 앞뒤가 맞는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흐루쇼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브레즈네프]] 시대에 들어서면서 소련은 스탈린의 방식대로 체제만 유지하고 그를 숭배했던 것에 대해 흑역사 취급하는 분위기로 흐른 반면, 북한의 김일성 숭배는 더욱 막장화되면서 소련에서 자기네들이 세워 준 정권인 북한의 김일성 숭배 선전물을 보며 비웃는 사태가 벌어졌다는 것이다.[* 권력의 세습여부가 이런 차이를 만든 것이다. 북한의 김일성은 스탈린 사후 생전에 그를 숭배하듯 모셨던 부하들에 의해 격하되는 것을 제대로 지켜보았고 이 때문에 세습 카드를 꺼내들었다.][* 여담으로 소련 내에서 이 김일성 숭배 선전물들은 요즘 말로 하면 무려 '''유료 구독제''' 시스템으로 운영되었는데,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의 증언에 따르면 소련의 중산층들이 밥상머리에서 '''가족끼리 읽으며 같이 웃을 만한 유머 잡지'''쯤으로 쓰려는 수요가 꽤 많아서 '''북한에서 직접 정기적으로 돈 받고 팔았다고'''(...). 뿐만 아니라 북한에서는 이게 소련에 먹히는 줄 알았는지 선전물들을 당대 최고의 인쇄 기술을 동원해 만들어 종이의 품질이나 잉크 등이 '''대단히 우수'''했으며 이를 상당히 저렴한 구독료로 팔았다고 한다.] 이 시절 [[소련|소비에트 연방]]의 모든 사람이 위대한 '''스탈린 동지의 영도력 안에서 행복을 느꼈다. 아니 느껴야만 했다.''' 소비에트 안에서 좋은 일은 모두 '친애하는 스탈린 동지'의 은혜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어떠한 작품도 그의 [[천재]]성을 언급하지 않고는 나올 수 없었다. 역사와 [[정치학]], [[경제학]], [[지리학]], [[화학]], [[물리]], [[유전학]] 까지도 '스탈린 동지'의 지도적 사상을 통합하지 않으면 완전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심지어 요리책에까지 '스탈린 동지'의 말이 인용되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자신의 사진을 게재하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어릴 적 마차 사고로 온전하지 못한 왼쪽 팔과 얼굴의 천연두 자국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는 '''사진보다 초상화를 많이 선호했다.''' 2차대전 후에는 너무 나이든 초상화를 거부해서 보통 그 이전의 초상화가 사용되었으며 모든 초상화는 '스탈린 동지'가 '''인정한 작품만이 공개될 수 있었다.''' 계속되는 [[선전]]과 [[세뇌]]는 억압적 독재 정권하에서도 효과를 발휘했다. 특히 독소전 이후의 상황과 연계되어 스탈린은 구국의 영웅으로 승격되었다. [[1984(소설)|이제 많은 소비에트 인민들이 실제로 '스탈린 동지'를 사랑했다.]] 아마 초기에는 그냥 살아남기 위해서 또는 [[굴라크]]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그를 숭배하는 사람이 많았고 스탈린이 독소전쟁에서 승리한 후부터 스탈린 격하 운동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실제로 숭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허나, 스탈린 숭배는 흐루쇼프에 의한 스탈린 격하 이후에 스탈린은 대중의 관심에서 사라졌고, 이 기조가 199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소련 붕괴 이후로 소련에 대한 향수가 늘어나면서 실제로 스탈린을 숭배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심지어는 정교회에서 스탈린 이콘이 나오는 사태가 벌어졌다. 초기에는 [[정교회]]를 비롯하여 종교 자체를 말살하려 했던 스탈린이지만 독소전쟁이 시작되면서 소련 인민들을 단결시키기 위하여 정교회를 거꾸로 밀어 주었기 때문이다. 다만 흥미롭게도 스탈린을 자신의 성으로 쓰며 오만방자하게 구는 둘째 아들 [[바실리 스탈린]]에게 스탈린은 다음과 같이 일갈하기도 했다. >'''"넌 스탈린이 아니고 나도 스탈린이 아냐! 스탈린은 소련 권력이야! 스탈린은 신문과 초상화에 등장하는 사람이지 네가 아니야! 나도 아니고!"''' 본인에 대한 극도의 우상화 속에서도 스탈린은 자신을 어느 정도 그 우상으로부터 분리해서 생각했다는 의외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한다. 거기에 더해 동시대의 [[이승만]]이나 [[김일성]] 같은 다른 독재자들과 달리 '''절대권력을 자식에게 세습하거나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기려는 시도가 전혀 없었음'''을 생각하면 스탈린의 우상화 조장과 방조도 결국 '''소련 체제의 강화와 안정화'''를 위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해석 역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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